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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사무국 조회 920 작성일 12-10-05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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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현장은 새로운 피가 절실하다!

제조업 공동화가 아니라 현장의 공동화가 노동계급운동의 미래를 위협하고 있다. 어느 현장이나 활동가가 없다고 아우성이다. 국민파조차 현장 재조직과 활성화 계획을 제출하고 있으며 ‘전국노동자회’와 ‘노동자의 힘’과 같은 단체들은 조직적인 현장이전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남한노동운동의 골간인 대공장 정규직노동자들의 평균연령은 사십을 바라보고 있다. 르노자동차 노동자 평균연령이 40대라는 말에 깜짝 놀라던 일이 이제 남의 일이 아니게 되었다.

활동가들의 재생산이 끊긴 지는 꽤 오래 전의 일이다. 구조조정 투쟁의 패배 이후 대공장에서 형식적인 임단협 투쟁 외에는 투쟁다운 투쟁을 찾기 어렵다. 투쟁 속에서 활동가들이 단련되고 성장할 기회가 사라진 것이다. 새로운 물갈이가 없는 속에서 일부 대공장 활동가들은 각종 비리사태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고인 물이 썩어가듯 부패하고 타락하고 있다.

금속대공장 운동의 침체 속에 중소영세사업장과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지만 이 투쟁들은 의식성과 경험의 부재, 고립, 중소사업장 자체의 한계에 자주 가로막히고 있다. 막연한 전망 속에서 맹목적 투쟁주의에 빠지거나 성과 없이 투쟁을 접고 산산이 흩어져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무엇보다 단련된 활동가들이 부족하다. 노동조합의 서기가 아니라 노동계급의 호민관이 될 현장의 사회주의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이런 상황은 노동 현장으로의 과감한 이전을 의식적 활동가와 사회주의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현장이전을 토대로 만들어진 민주노조운동

80년대 초반 혁명적 지식인들의 대규모 현장이전이 오늘날 민주노조 운동의 토대가 되었음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다.

1970년 전태일 열사의 죽음과 ‘대학생 친구라도 있었으면’이라는 절규는 당시 지식인들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민주화 운동이 노동자와 민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반성이 지식인 내부에서 등장하기 시작했다.

광주민중항쟁은 다분히 인도주의에 머물러 있었던 이러한 인식을 더욱 심화시켰다. 80년 봄, 광주에서 나타난 지배계급의 엄청난 폭압성과 노동자민중의 치열한 투쟁은 노동자민중이 중심이 된 혁명적 투쟁 없이 남한에서 최소한의 민주주의도 불가능하다는 공통의 인식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80년대 초반 지식인들의 거대한 현장이전의 물결을 일으켰다.

수많은 지식인들이 “혁명을 꿈꾸며” 현장에 “투신”했다. 1983~86년 사이 매년 수 백 명의 학생들이 현장에 이전했다. 80년대 중반까지 최소한 3000명 이상이 노동자계급으로 자신의 존재조건을 변화시켰다. 현장이전 방식을 놓고 학생운동 내에서는 무림-학림, 야비-전망 같은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나 어느 쪽이든 학생운동의 사회진출은 당연히 현장이전이라는 기본적인 인식은 동일했다.

12.12 군사쿠데타로 등장한 신군부는 박정희 사후에 막 활성화되고 있던 노동운동을 무자비하게 탄압했다. 노조의 정치활동금지는 물론 노조 결성과 활동을 중지시키고 민주노조를 강제로 해산했다. 심지어 민주노조 간부들을 삼청교육대로 끌고 가기까지 했다.

의식적 활동가들의 현장이전은 탄압으로 파괴된 민주노조운동의 명맥을 이어주고 새로운 운동의 기반을 만드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지식인들의 현장이전은 주로 구로, 인천, 부평, 안양 등 학생운동의 중심지인 서울 인근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다. 이렇게 현장으로 이전한 의식적 활동가들이 몇 년 간 닦은 기반을 바탕으로 85년 인천 대우자동차 투쟁, 구로동맹 파업 같은 투쟁이 일어날 수 있었다.

이 투쟁들은 군사정권의 숨 막히는 억압 속에서 가뭄의 단비 같은 역할을 하였고 87년 7.8.9월 대공장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대투쟁이 터져 나오는 토대가 되었다. 노동자 대투쟁을 계기로 민주노조 운동은 급속하게 확대되었다. 노동운동의 불모지였던 금속대공장에 민주노조가 세워졌으며 그 뒤 한 해 동안 약 4000여개의 민주노조가 건설되었다.

혹자는 의식적인 현장이전과 남부 공업도시들을 중심으로 터져 나온 7.8.9월 노동자 대투쟁이 무관했다고 이야기한다. 대공장의 투쟁은 거의 완전히 자생적인 투쟁이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80년대 초반부터 축적된 노동자운동의 경험과 투쟁이 없었다면 87년 대공장노동자들의 폭발적인 투쟁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의 붕괴와 현장이전 흐름의 단절

87년 노동자 대투쟁은 노동계급의 거대한 잠재성을 확인해주었다. 그러나 오히려 학생들의 현장이전은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는 첫째 학생운동 자체가 반합법적 진지를 쟁취하면서 학생회를 중심으로 자기완결적인 메커니즘을 형성해 나갔기 때문이었다. 졸업하거나 중도에 학업을 중단하고 현장이전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학교에 있으면서 정파운동이나, 동아리 운동을 지도하며 5학년, 6학년, 심지어 7학년, 8학년까지 학생운동을 하는 일이 많아졌다.

둘째 합법.반합법적 공간의 확대로 정치단체, 청년단체 등이 활성화되면서 굳이 노동현장이 아니더라도 운동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다양해졌다. 노동자 운동 역시 노동조합이나 현장조직 등과 같은 자기 질서를 형성해 나갔기 때문에 외곽에서도 간접적으로 현장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이런 양상은 90년대 초반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이 붕괴되면서 더욱 심화되었다. 당대를 풍미하던 PDR론이나 NDR론은 혁명적 수사에도 불구하고 실내용은 민주주의 변혁을 넘어서지 못했다. 문민정부가 등장하면서 위로부터 급속한 민주주의 개혁이 이루어지고 동구권이 몰락하자 이러한 한계는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은 급속하게 붕괴되었다.

혁명적 민중주의 운동의 붕괴와 함께 노동계급으로부터 탈주가 대세를 이루었다. 현장 이전을 했던 지식인들이 광범위하게 현장에서 이탈했다.배신과 변절이 잇따랐고 노동자 운동 역시 이 시기를 기점으로 점차 실리주의와 조합주의로 경도되기 시작했다.

학생운동 내에서는 애국적 사회진출론, 진보적 사회진출론 같은 소부르주아 이데올로기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이런 주장들은 운동의 대중화라는 명목을 내걸고 있었지만 본질적으로 자기 학력에 맞는 정상적인 일반시민으로, 쁘띠부르주아로 살아가는 것을 정당화하는 논리일 뿐이었다.

인민노련과 진정추 활동을 했으나 현재 뉴라이트 운동의 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는 신지호는 「당신은 아직 혁명을 꿈꾸는가?」라는 글에서 당시의 그런 정서를 명확히 대변해 주었다.

"학생운동을 하는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그대들의 목표는 공장생활, 노동운동가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들 세대로 충분하다. 21세기를 이끌고 갈 훌륭한 지식노동자가 되라. 대학 생활을 그것을 위한 예비기간으로 삼으라."

대부분의 학생운동은 알튀세, 그람시 등을 받아들이며 부문주의와 자유주의 경향으로 나아갔다. 노동계급적.혁명적 지향성을 가진 학생운동은 소수화 되었다. 그러나 이 운동은 혁명적 민중주의의 전투성을 복원하자는 호소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90년대 중반 전투적 학생운동은 전학투련, 전학투위와 같은 공동투쟁체를 중심으로 활동했다. 이러한 운동은 가두시위나 관공서 타격과 같은 물리적 투쟁의 방식으로 정세 사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려 했다.

하지만 이런 활동은 전투적 운동의 맥을 이어주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했다. 학생사회의 급속한 변화와 운동세력의 해체를 따라가지 못하고 이념적 취약성과 실천적 무능력을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97년 총파업 시기에 노동자 대중투쟁이 일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전투적 학생운동은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오히려 점차 해체되어 갔다.

90년대 중반에도 미약하나마 현장이전의 흐름은 이어졌다. 여기에는 ‘노동자진보정당추진위(노진추)’의 역할이 컸다. ‘노진추’의 현장이전 캠페인에 굳이 회원이 아니더라도 현장이전을 고민하는 학생출신 활동가들이 그 소개로 이전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이마저도 90년대 후반 노동자 정치운동이 급속히 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지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이런 사업은 노동운동이 점차 고령화되는 속에서 신진 활동가들을 배출하고 운동의 맥을 이어주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정규직 운동의 초기 태동에 기여했다.

새로운 현장이전의 경험과 혼란

97년 총파업과 이어진 구조조정 분쇄투쟁을 거치며 학생운동에 새로운 노동계급적 운동진영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소규모지만 노학연대를 자신의 중심적 활동으로 삼는 학생운동 단위들이 수도권을 중심으로 여럿 등장했다. 이들로부터 졸업 이후 현장이전을 고민하는 활동가들이 배출되었다. 선전그룹으로 존재하던 혁명적 사회주의 그룹들도 98.99년 대중운동의 고양을 경험하며 현장으로의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2000년경부터 이들을 중심으로 다시 현장이전의 흐름이 이어졌다. 90년대 중반부터 대공장 정규직으로의 취업이 불가능해진 상황에서 이 동지들 은 비정규직 취업 외에 현장이전의 길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러나 2000년 이후에 현장 이전을 한 동지들이 부딪친 현실은 90년대 중반과 또 다른 것이었다.

95.96년경부터 대공장 취업문은 사실상 닫혔다. 대규모 채용은 없어졌고 직업훈련원을 이수해도 더 이상 정규직취업이 보장되지 않았다. 따라서 90년대 중반 이후에 지역으로 내려간 동지들도 사내하청이나 중소업체로 취업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사내하청은 아직 미조직 분야였고 운동의 흐름이 존재하지 않았다.

80년대 초반 현장에 이전한 동지들의 경우, 상당히 오랜 기간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신뢰를 쌓고 기반을 잡는 작업을 해야 했다. 노조체계가 형성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새롭게 현장에 들어간 의식적 인자들은 주변의 노동자들과 다양한 성격의 소모임을 만드는 활동으로부터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90년대 중반의 상황은 달랐다. 이 시기 현장에 이전한 활동가들은 선배들과 달리 거의 바로 활동에 들어갈 수 있었다. 노동조합, 현장조직, 해복투 등 80년대 후반 학생운동과 유사한 운동질서가 노동운동에도 체계적으로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활동가들의 재생산 흐름이 끊기기 시작하고 현장이전이 드물었던 상황에서 실무능력을 가진 학생출신 활동가들은 현장 활동가들에게서 환영을 받았다.

신참활동가들은 학생운동에서 닦은 능력을 무기로 운동 질서에 편입하여 빠르게 중심적인 활동가로 뛰어오를 수 있었다. 80년대 현장 이전했던 동지들처럼 토대를 쌓는 활동 없이 이미 존재하는 활동공간에 개입하는 것으로 일정한 활동을 펼쳐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몸은 비정규직노동자로 노동을 하고 있더라도 이런 활동은 현장 활동이라기보다 현장조직이나 노동조합의 간사 혹은 참모에 가까운 역할이었다.

하지만 90년대 후반 구조조정 투쟁 과정 속에서 선진노동자 운동질서가 급격히 몰락하면서 그들의 영향력 역시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었다. 2000년대 초반 현장에 이전한 동지들은 이러한 변화 속에서 현장에 자리를 잡는데 큰 혼란과 어려움을 겪었다.

90년대 중반과 달리 2000.2001년 비정규직투쟁은 활동가들에게 비정규직투쟁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2000년 이후 현장에 이전한 활동가들은 대부분 비정규직모임을 만들고 활동에 나섰다. 그러나 기존 운동 경향이 가진 관성의 힘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이런 경향은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대중을 조직해서 투쟁을 만들어나가기 보다 기존 운동질서나 활동가들의 소통구조를 중심으로 활동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중을 조직해서 투쟁하기보다 활동가들의 세력편성이나 판짜기를 통해 투쟁을 만들고 그를 통해 대중이 조직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미 기존 운동질서가 무너지고 대중과 괴리된 상황에서 이런 시도들은 대개 실패로 나타났다.

한편 그에 대한 역편향으로 80년대 현장이전 활동초기 나타났던 ‘준비론’이나 ‘생활론’과 같은 혼란이 그대로 등장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활동 역시 별 도움이 되지 못했다. 이미 80년대 초반 비판적으로 평가됐다시피 이러한 활동으로는 투쟁을 조직할 수도 활동가들을 육성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왜 지금 현장인가?

남한의 노동운동은 중소사업장 투쟁으로부터 대공장 운동으로 전진하였다. 87년 이전까지 대공장의 투쟁은 거의 없었고 중소제조업을 중심으로 투쟁이 벌어졌다.

지금도 별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대공장 정규직 운동은 침체되어 있는 반면, 비정규직.중소제조업 투쟁은 자본의 탄압과 관료들의 협잡 속에서도 그나마 끈질기게 이어지고 있다. 의식적 활동가들도 주로 이곳에 포진해 있다.

금속대공장 정규직노동자를 기반으로 한 남한의 선진노동자 운동은 붕괴됐다. 금속대공장에 존재했던 선진노동자운동은 386처럼 공통된 경험과 정서를 가지고 있는 하나의 세대를 의미했다. 이들은 70년대 이후 민주노조 건설투쟁의 역사 속에서, 87년 대투쟁의 산물로써 형성된 층이었다. 80년대 초중반부터 민주노조 건설투쟁에 참여해온 사람이거나 87년 대투쟁의 영광 속에서 운동에 뛰어든 사람, 또는 90년대 초중반 민주노조운동의 뜨거운 열정이 식기 전에 운동에 참여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80년대 후반,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의 팔팔하고 두려울 것 없던 활동가들은 이제 30대 후반에서 40대 중반이 되었다. 꿈을 꾸고 살기엔, 자신을 운동에 투여하기엔 너무 늙고 노회해졌다. 스스로 투쟁하고 현장에서 운동을 재조직하기 보다는 힘든 일을 피하고 그동안 쌓아온 명망과 인맥을 통해 체면과 권위를 유지하는 부류가 늘었다. 이들의 실체는 지난 구조조정 투쟁 과정에서 적나라하게 폭로되었다.

대공장에서 20대에서 30대 초반의 새로운 운동 층은 형성되고 있지 않다. 비정규직 운동을 중심으로 새롭게 형성되는 대중투쟁은 아직 약하고 미숙하다. 이 때문에 비정규직 운동에도 민노당, 민주노총 같은 주류운동의 영향력이 점점 더 강화되고 있다.

현장의 선진노동자층이 유실된 현재와 같은 상황에서 이제 다시 사회주의자들은 팔을 걷어붙이고 대중 속으로 들어가 그 속에서 새로운 선진노동자운동을 만들어 내기 위해 투쟁해야 한다. 이것은 장기적이고 끈질긴 작업을 필요로 한다.

현장활동과 정치활동은 때로 대립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노진추, 사회당과 같은 정치조직에서 현장이전을 추진했었지만 당 활동이 현장활동의 안착을 방해한 적이 많았다. 반대로 현장사안만을 강조하여 전국적 사안에 대해 무관심을 정당화하는 경향도 있었다.

그 때문에 현장이전이나 현장활동에 대한 강조를 두고 경제주의 또는 대기론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그러나 현장은 모든 노동자운동의 기초이며 현장이 죽으면 우리 운동에 미래가 있을 수 없다. 지금 현장은 마치 90년대 중반 망해가는 학생운동을 보고 있는 듯하다. 기존 잘 나가던 대공장에도 아예 노골적인 어용세력이 득세하는 곳이 많다.

정파를 막론하고 제 조직에서 현장 활성화 계획을 새삼 제출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위기감 때문이다.

사회주의자들에게 자신의 이데올로기적?정치적 중심을 굳건히 세우는 일은 당연하고 지극히 중요하다. 하지만 팔다리 없이 머리 뿐의 운동은 기형이다. 미약하더라도 현장에 뿌리를 박고 영양분을 섭취해야 건강하게 자랄 수 있다.

운동세력이 현장의 기반으로부터 멀어질 때 선전주의로 흐르거나 우익화할 가능성이 높다. 서구의 여러 뜨로쯔끼주의 그룹들이나 우익화되고 있는 영국 사회주의노동당의 경우를 우리는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어디에서 출발할 것인가?

그렇다면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 것인가? 우선적으로 제조업 육체노동자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 90년대 초반 김문수, 신지호와 같이 노동계급운동에서 이탈한 자들은 하나같이 ‘제3의 물결’ 따위를 읽으며 지식노동자가 중심이 되는 자본주의의 새로운 국면이 도래했다고 주장했다. 맑스주의적 계급론과 혁명론은 낡은 것이라고 떠들어댔다.

70년대 이후 선진자본주의 국가에서 제조업 비중이 줄고 전통적 의미의 프롤레타리아트 역시 줄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세계적으로 볼 때 새로운 프롤레타리아트는 끊임없이 창출되고 있다. 그들 국가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줄고 있는 동안 지금 동유럽과 중국, 인도에서 급속한 산업화와 함께 더욱 대규모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창출되고 있다. ‘노동의 종말’ 이 아니라 산업거점이 이동하고 있을 뿐이다.

남한을 포함한 동아시아 일대는 세계적인 차원에서 생산벨트가 되고 있다. 남한은 여전히 제조업 중심 국가이며 제조업 육체노동자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트의 핵심을 구성하고 있다. 구조조정을 통해 집적과 집중이 강화되면서 고용비중은 줄었지만 제조업이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물론 사회주의자가 가장 중요한 거점으로 생각하는 곳은 대공장일 것이다. 자본의 집적과 집중의 산물인 대공장은 노동자계급 단결의 주요한 객관적 조건이며 사회주의로의 이행에 핵심적인 부분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공장 취업은 나날이 더 어려워지고 있다. 인맥이나 돈 없이는 불가능하다. 게다가 일정정도 고용안정이 되고 있는 1차 하청업체로의 취업도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 웬만한 대공장의 1차 하청업체에는 이력서가 잔뜩 쌓여있는 상태다. 대공장의 호황과 자본의 포섭전략이 계속되면서 정규직 운동질서의 특권화, 보수화도 심각한 양상이다.

현장이전을 하려는 동지들이 많지 않고 취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대공장만을 고집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남한의 산업지형은 대공장을 중심으로 주변 연관 산업이 모여드는 방향으로 전개되고 있다. 대공장의 비정규직과 주변 중소업체들은 대개 인적인 유동성이 있다.

따라서 단사가 아니라 지역을 보고 대공장을 중심으로 하청업체들과 중소제조업을 아우르는 이전계획과 활동이 요구된다. 몇 사람 함께 이전할 수 있다면 팀을 짜서 지역의 여러 사업장에 들어가 네트워크를 짜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노동운동을 하려는 인텔리 출신 활동가들에게 흔히 쉽게 활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노조나 현장조직의 간사로 들어가거나, 익숙하지 않은 생산직보다는 공공이나 사무서비스 계열의 안정적인 자리에 들어가려는 경향을 볼 수 있다.

간사로의 취업의 경우 쉽게 활동가로 인정받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간사의 경우 자기 영향력이 아니라 활동가들에 미치는 영향력으로 정치력을 발휘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활동가들에 대한 의존성이 커지고 관점이 상층화되기 쉽다. 노조나 현장조직 질서의 정치적 변질이나 타락에 의해 전선으로부터 밀려나는 것이 쉽다는 것도 약점이다.

공공부문 역시 구조조정 이후 취업의 문이 좁아지고 있다. 또한 특권 의식이 활동가까지 감염시켜 의식적으로 이전한 동지들도 생활인으로 전락하고 마는 경우가 나타나고 있다. 공공부문도 금속대공장처럼 비정규직 투쟁이 등장할 때 쇄신의 전망이 나타날 가능성이 높다.

학생 운동가들의 경우 사회적 존재이전에 대한 두려움. 학생 운동에 대한 미련 때문에 의해 존재이전을 망설이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현재 학생운동의 상황을 볼 때 오래 남아있다고 뭔가 배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대중운동의 마인드와 실무적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것은 80년대 중반에서 90년대 초반 학생운동이 대중운동의 메커니즘을 이루고 있을 때 얘기다. 지금처럼 학생운동이 학원사회에서 고립돼 있고 노동계급적 학생운동이 소규모 동아리를 넘어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장기간의 학생운동은 오히려 노동자운동이나 사회주의 운동에 대해 관념성만 강화시키는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학생운동에 오래 남아있는 것보다 일정정도 결의와 준비가 됐다면 현장으로 이전해서 노동자운동 속에서 대중운동을 배워나가고 단련하는 것이 낫다. 이를 위해서는 애국적 사회진출론, 진보적 사회진출론 등이 불어넣은 가족과 마찰 없는 정상적인 취업이라는 쁘띠부르주아 이데올로기와 단호하게 단절해야 할 것이다.

현장이전을 통해 계급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창출해야 한다.

전노협과 전국회의는 광범위한 선진노동자를 포괄했지만, 그것은 정치적으로도 조직적으로도 조합주의를 넘어서지 못했다. 이들 선진노동자 운동은 결국 사회주의 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붕괴되었다.

90년대 중반 사회주의자들의 과제가 선진노동자운동에 결합하고 그들을 사회주의운동으로 끌어올리는 것이었다면 이제는 사회주의자 스스로 선진노동자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만들어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새로운 세대의 선진노동자운동을 형성하는 것과 선진노동자운동을 사회주의 운동층으로 성장시키는 것은 이제 사회주의자에게 분리 불가능한 하나의 과제가 되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장 속에서 경험 많고 단련된 사회주의 현장 활동가들이 형성되지 않으면 안 된다. 현장이전을 통해 계급운동의 새로운 토대를 창출하자! 가자, 현장으로!